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어떠한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제자 혹인 지인들, 대표적으로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에게 비판적인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은 대부분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 편에 근거한 것이다.
석공인 스프로니스코스와 산파인 파이나레테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인도 본업이 석공이었다고 전해진다. 외모는 못생겼었다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외모지상주의 풍조가 있던 당시 아테네에서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그의 미남 제자가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 하니, 아테네의 외모지상주의나 소크라테스의 추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만하다. 플라톤의 저작 메논에서 메논은 소크라테스와 논쟁 중에 그를 '전기가오리 같다'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모를 불문에 부치고도 그의 풍모는 상당히 비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발을 신지 않고, 누더기가 되기 직전의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서 난 이렇게 다녀도 익숙해서 편하고 정신력도 단련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옷이나 신발에 길들여져서 불편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이런 초연한 풍모를 과시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석공 출신이라 그런지 상당히 튼튼한 몸을 타고난 것으로 여겨진다. 잔치 자리에서 술을 가장 많이 들이켜고도 가장 말짱한 정신으로 가장 늦게까지 토론을 하다가 유유히 떠날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알코올 분해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또한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에도 배고픔이나 목마름, 추위, 더움, 잠자리, 적군 등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던 강철멘털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사색을 즐겨하여, 어떤 문제가 떠오르면 해답이 떠오를 때까지 밤낮은 가리지 않고 가만히 서서 몇 시간이고 길게 생각에 잠기다가 해답을 찾고 자리를 떠나는 일이 종종 있어서 다른 아테네 사람들이 구경하였다고 한다. 여러 모로 기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아내였던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였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앞 뒤 정황을 따져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오히려 현처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사실 아내 입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돈도 없는 주제에 맨날 돈 많은 사람(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사색한답시고 수다나 떨러 다니는 남편으로, 집안 살림은 크산티페가 다 책임졌다. 소크라테스가 물려받았으나 운영 등에 무관심하여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석공소도 크산티페가 직적 운영했다. 그러나 이런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내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사망할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다혈질기가 있었고 잔소리에 자주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부부관계가 파탄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었다. 아내의 잔소리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부인이 참을성을 길러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하여튼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전해지는 것은 다툼이 많은 친구를 악우라고 하는 것처럼, 단어 그래로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보이며,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라는 농담도 그 행간을 읽을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나이에 중보병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당대 아테네 시민은 신체 및 정신에 장애가 있거나 만 50세를 넘지 않았다면 군복무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군인으로 참여했다. 대표적인 참전 전투로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였으며, 그가 소속된 부대도 소크라테스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 하지 안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무려 세 번이나 참전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변명>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당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위에 서술된 것으로 세 번 참전했던 것과, 딱 한 번 이스트모스에서 포세이돈을 위해 열리는 대축제였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구경하러 간 것을 합쳐, 단 네 번 밖에 아테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아테네의 법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식으로 자문자답한 <소크라테스의 독백>에 의하면, '우리(아테네의 법)와 우리의 도시(아테네)만으로도' 소크라테스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은 가난했다.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철학자의 삶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벌어오라는 아내의 구박을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 티격태격 싸우는게 일상다반사가 된 것.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루는 제자들 중 한 명이 '스승님, 언제 결혼은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이렇게 가난했던 소크라테스가 일개 수병도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은 돼야 군장을 마련할 수 있었던 중장보병으로 어떻게 참전할 수 있었느냐다. 이에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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