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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과 이론

소크라테스 공적인 삶, 산파술

by 쑤바웅 2024. 1. 19.

석공소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가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재개발 사업으로 단단히 한몫 잡았을 거라는 설, 소크라테스 대신 석공소를 운영했던 크산티페가 의외로 수완이 탁원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설, 알키비아데스 같은 부유한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 군장을 마련해 드렸을 것이라는 설 등. 아니면 그냥 대대로 군장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로서, 소피스트들의 퀘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상대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지극히 기이한 인물로, 하늘 일도 없이 시장이나 광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묘한 철학적 질문을 해댄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아테네에서는 공적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의사를 피력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공적인 모임에도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다.<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에서는, 그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다이몬이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좀 더 와 닿게 설명하자면, 돈도 안 벌어오면서 딱히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다 얘기를 나누다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가 비록 공적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현대인들보다 대단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걔중에서도 아테네와 같이 가장 번성하고, 개방적인 도시국가는, 외국인이나 시민권을 얻지 못한 채 오래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시민권자들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민권자들이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국가정책이나 도덕에 대해 토의를 하는 것은 현대보다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현대로 치면 명사나 학자들이 TV나 유투브 교양 방송에 나와서 토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며, 오직 아리스토파테스, 크세노폰, 플라톤 같은 당대 인물들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남긴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거기다가 이런 소크라테스와 알고 지내던 당대 인물들조차도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각기 생각이 달랐던 것으로 보이기에, 2천년이 훨씬 넘은 21세기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바로 이러한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으며, 실제로 어떤 생각을 했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학계에서는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부른다. 상기된 바와 같이 우리는 흔히 아는 소크라테스의 면모는 대게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규명하는 것은 여전히 문헌학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추가 질문을 계속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러한 질문 중심 교수법을 소크라테스 문답법, 혹은 산파법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글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패턴은 1. 상대가 어떤 A주장을 한다. 2. 소크라테스가 A주장에 나온 단어 a의 뜻을 묻는다. 3. 상대가 a=x라고 답한다. 4. 소크라테스가 다시 x의 뜻을 묻는다. 5. 상대가 x=y라고 답한다. 6. 소크라테스가 a하고 y는 서로 모순됨을 지적한다. 7. 상대는 벙어리가 된다. 거듭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유도심문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다는 다른다. 함정에 빠뜨리거나 혹은 심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부터 검토해 나아가는 것이다. 상대방은 이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개념이 사실은 오류가 있는 개념임을 깨닫게 되고, 당황하거나 화내거나 부끄러워하게 된다. 이를 아포리아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신파술을 사용한 이유는 그의 주상대가 소피스트라는데 있다. 당시 소피스트들이 가진 대세의 의견은 진리는 그 사람의 주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정답이란 정해진게 없고, 질문하는 사람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상대방에 맞춰서 그때 그때 대응하는 어떻게 보면 매우 유연하고, 어떻게 보면 매우 일관성이 없는 주장을 늘어놓고는 했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것은 사유에 있어서 정의의 중요성이다.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않고 생각을 하니까 도대체 진척이란게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삶동안 소피스트들을 박살내면서 정의를 내리는 것의 중요성을 몸소 실현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산파술에 대해서는 많은 불만이 있어왔다. 이에 관해서 플라톤의 경우에는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아는 것이 없는 무지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항상 끝맺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소크라테스가 답을 찾는 여정 자체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계속 산파술을 시전하고 다닌 끝에, 결국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말을 남겼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델포이 신전에 어떤 사람이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무녀는 평소에 늘 쓰던 은유나 수사들을 생략하고 단 한 마리로 '아니'라는 신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여, 똑똑해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똑똑해 보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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