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친척들에게까지 망신을 주게 만들었으니, 이는 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친척들이 아니라 의사와 변론할 줄 아는 사람들이 도움을 준다고 말함으로써였습니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한편 친구들과 관련해서는 이로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지 못한다면 친구들이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이로움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발자는 말했다. 또한 그분은 필요한 것들을 알고 있고 설명해 줄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존경의 가치고 있다고 공언했다고 고발자는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시인의 시구를 골라서 비틀어서 오독하는 기술로 제자들에게 부도덕한 내용을 가르친다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한다. 고발자는 그분이 명성이 드높은 시인들에게서 아주 몹쓸 구절들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못된 짓을 하고 폭정을 일삼으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헤이오도스의 "일은 전혀 비난거리가 아니고, 게으름이 비난거리이다."를 인용해서는 부정의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멀리하지 말고 그것들도 이익을 고려해서 행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발자는 호로메스의 말을 소크라테스가 자주 했다고 말했다. "백성들 가운데 소리치는 자가 보이고 눈에 띄면, 그는 지휘봉으로 때리고 말로 꾸짖었다."의 뜻을 그 시인이 일반 백성들과 가난한 자들을 때리는 것을 칭찬했다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즉 크세노폰을 정리하면 고발내용은 다시 4가지로 풀어낼 수 있다. 1. 아테네의 종교적 권위를 무시했다. 2. 아테네의 가부장적 권위/전통을 무시했다. 3. 아테네의 민주주의 관직 제도를 무시했다. 4. 아테네에 폭군들을 키워냈다. 1번과 2번의 경우, 일반 아테네 대중의 반감을 산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아테네는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아테네인들의 유수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만큼 막연하게 그들이 이성적이고, 비종교적이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사소한 가정문제에서부터 중용한 군사결정까지 점을 쳐서 결정할 때가 많았고, 그러한 점치는 행위에는 신이 관여한다는 종교적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에 제비 뽑기 선발제도를 무시하는 것은... 모욕이었다. 그들은 제비 뽑기 기계 클레로테리온의 구멍으로 흰색과 검은색 패를 인도하는 것은 신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대 그리스에서는 신의 승낙 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클레로테리온은 단순한 제비 뽑기 기계가 아니라 효험 있는 주사위 점이었다. 절대로 비웃어서는 안 될 신성하고 신비로운 절차였다. 더군다나 아테네에서는 데모크라티아는 근대국가의 세속헌법적 의미가 아닌, 그 자제로 신격을 지닌 신으로 대우받았다. 그리고 선거를 민주정치의 한 형태로 인정하는 근대인의 생각과 정반대로, 아테네인에게 선거란 비민주적인 행위였다. 이런 환경에서 직접 민주정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의 행보는 데모크라티아라는 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아테네에서 '추첨'은 신의 질서가 개입하는 종교적 행위였다는 것도 중요하다. 곧 '추첨'은 본질적으로 제비를 뽑아 점을 치는 행위였고, 바로 그 '점치기'를 소크라테스가 비판한 것이다. 한편 아테네의 가정은 각각 하나의 나라이고, 가부장이 그 나라의 임금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가부장적 권위는 크게 존중받았다. 그러한 가부장들이 곧 아테네의 시민으로 여겨졌던 만큼 가부장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공격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동시대의 뛰어난 지성 중의 하나이던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증어했던 것도 1번, 2번 항목 때문이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3번과 4번은 당대의 정치적인 문제와 깊게 연관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위험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은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이다.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을 모두 몇 차례 씩 배신한 희대의 배신자이자 기회주의자였다. 한편 크리티아스는 적의 앞잡이가 되어서 폭정을 했던 이완용 같은 인물이었다. 플라톤과 비교해서 크세노폰에만 왜 정치적인 고발내용이 이렇게 풍부하게 들어가 있는지 의문이 학계에서는 제기되어 왔다. 도리옹을 비롯한 콜라이아코와 같은 학자들은 크세노폰만이 언급하는 고발내용은 플라톤이 언급하는 세명의 고발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학자들은 기원전 403년에 내려졌던 '사면령'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재판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장기적인 전쟁에서 패배하여 그 황금기가 막을 내린 시점이었다. 아테네에는 잘 교육받은 귀족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과두파와 도시의 일반 시민들을 대변하는 민중파가 존재했는데, 스파르타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스파르타는 과두파가 정권을 잡을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크리티아스를 중심으로 30인이 권력을 독점했는데, 이들은 매우 끔찍한 폭정을 아테네에서 휘두른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 숫자를 3000명으로 제한을 하는 한편 민중파와 온건-과두파를 대대적으로 학살했고, 그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몰수했다. 당연히 이들의 폭정은 시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년 만에 민중파가 들고일어나서 내전이 발생한다. 민중파에 의해 민주정이 회복되었을 때, 민주정은 이전의 과두파에게 "다시는 과거사를 들추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서 통합을 시도한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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